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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번째 제자이자 남양주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는 조용기 원로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삼중축복 오중복음의 신앙과 4차원의 영성을 기반으로
든든하게 서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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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정리
전쟁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볼 때는 로맨틱하고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몸서리치는 악몽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전쟁도 이제 40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오늘날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역사책에서나 읽는 과거의 전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그 전쟁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속에 현실로 살아있는 전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전쟁의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40km의 동, 서로 잘라 놓은 3.8선 일대에 순식간에 스탈린과 김일성이 주재한 전쟁의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대한민국보다 수적으로 배나 월등한 군대를 거느리고, 242대의 T-34 탱크와 198대의 비행기와 226문의 122mm 곡사포와 36문의 고사 포와 각종 박격
포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탱크 한 대가 없습니다. 전투기 한 대도 없고, 곡사포 한 대, 고사 포 한 대도 없으니 무장한 수적으로 월등히 열세였던 국군은 순식간에 경을 떼고 말았습니다. 뭐, 상대가 안돼요. 어른과 어린아이의 씨름입니다.
그래서 3.8선은 무너져 버리고 노도와 같이 전 3.8선 일대에서 북한군은 공격을 계속 해 왔습니다. 그 전쟁은 마치 창을 솜을 뚫듯 파죽지세로 인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전쟁은 3년을 계속했고, 그 결과로 남한은 초토화되고 국군, UN군, 경찰 및 민간인 56만 1천 5백여 명이나 죽고, 부상자는 106만 9천여 명, 실종자는 35만 5백여 명, 전재민이 362만 ,전쟁 미망인이 29만 명, 전쟁 고아가 5만 9천여 명이 거리를 헤매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비참한 우리 민족사에 영구히 잊지 못 할 동족이 동족을 죽인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전쟁은 우리 대한민국은 막지 못했나요? 능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였나요? 6.25 사변은 제 2차 대전 후 세계 정복의 혈안이 되었던 소련의 스탈린과 그의 충복 김일성에 의해서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습니다. 3.8선이 갈려졌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즉시 소련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해서 북한을 소비에트로 하고 그
리고 군대를 창설하고 계속해서 군비 증강을 했습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이후에 동구라파를 야금야금 먹어서 다 소비에트로 한 다음에 이제는 중공을 적화시키고 난 이후에 대한민국을 소비에트로 하고 나아가서 아시아 일대의 약소 국가를 다 공산화하려는 계획 가운데서 치밀하게 계획을 하
고 준비한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오늘날 역사가 기록한 그 것과 같은 비극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소련과 김일성이 적화 통일의 모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그 틈을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둑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집에서 충분히 도
적을 미리 방지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충분히 북한의 모든 계획을 알고 거기에 대처를 했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도 이렇게 비극적으로 강토가 모두 짓밟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 감히 스탈린과 김일성이 한국을 넘볼 수 있었나요? 그것은 그 당
시에 혼란하고 무질서했던 한국 사회의 형편이 능히 적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혹이 된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서 온 전체가 소용돌이쳤습니다.
정치도 좌, 우익이 갈라지고 사회도, 학교마다 좌, 우익이 갈라져서 매일 테러요, 매일 같이 싸움이요, 매일 같이 데모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남로당이 사주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 일대의 폭동은 지금도 가슴이 섬짓합니다. 그 이후에 대한 민국 정부가 성립되고 난 다음에도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고,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과 군인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래서 하루도 평화로움이 없는 곳에 격렬한 노동자들의 정치성 파업은 계속하고, 공산 게릴라들 때
문에 극히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적인 불안은 극에 달했습니다. 한국의 생산시설이란 전쟁 이후에 조금 있는 것! 다 노사 분쟁으로 문을 닫고, 그리고 밀수가 성행해서 그 당시에 마카오 신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카오에서 이 천을 밀수 해서 그 당시에 마카오 천을 가지고 옷을 해 입으면 마카오
신사라고 굉장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불안 가운데서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얼마나 무력합니까?
1948년 8월 10일에 남한 자체의 선거를 통해서 제헌국회가 탄생한 이후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제 1공화국이 탄생되어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1공화국 탄생 후 1년 8개월 10일 만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와 같은 전쟁이 비극적으로 발발한 것은 우리 한국의 대통령 이하 그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조금도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해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국 처칠에게 지도자는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물으니까 처칠이 대답하기를 "적어도 1년 후의 일을 바라볼 수 있는 꿈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멀리 못 바라본다 할지라도 적어도 1년 후에 일어날 것은 미리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 국가와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 당시에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어떻게 1년 후 아니라 하루 앞일도 바라보지 못하는 무능력한 정치를 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련을 업고 끊임없이 적화야욕을 키워오던 김일성의 침략준비를 하나도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