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15 : 36-41
구분: 기쁜소식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영준 목사
제목: 한번 떠나간 사람
일시: 2014년 2월 9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영화를 보면 학생시절에 깡패처럼 학생들 위에 군림을 하다가 쫓겨난 아무개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직접 찾아오지는 않고 조화를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화에는 그럴듯하게 자기 이름을 썼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문구로 영화가 끝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옛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는 어떻게 변했고 어떤 삶을 살고 있겠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계속 왕래를 하는 친구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이고, 왕래가 끊어지고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본인이 찾아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것은 사실 오십보백보입니다. 대충 고만고만 합니다, 예외는 있지만. 특별히 잘 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특별히 못 사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신앙이에요. 과거에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 중, 고등학생이었을 때 함께 교회 다니던 지체들에 대하여 당시에도 어느 정도는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믿는 사람인지, 아니면 흉내만 내는 것인지, 아니면 갈등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났을 때 의외로 그 때의 패턴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당시에 진짜로 믿던 친구는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믿는 시늉만 하던 친구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때 갈등하던 친구는 여전히 갈등을 하고 모습을 발견합니다. 장구한 세월에 비교했을 때 인간의 변화는 그렇게 신속하지 않습니다. 삼십년, 사십년이라는 세월이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긴 세월이 아닙니다. 될 성싶은 나무는 잎사귀부터 안다는 말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대다수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가룟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데마 이 정도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목매달아 죽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에게 거짓말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외의 인물들은 예수님의 열 한 제자를 비롯하여 사도바울이든 그 이외에 나중에 믿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순교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기록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과 은혜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오늘 본문에 마가라는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한 때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 선교를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행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돼서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과연 잘 한 것이냐?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고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마가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왜 돌아갔느냐? 돌아갔다면 왜 다시 되돌아왔느냐? 되돌아 올 것이라면 왜 애초에 떠나갔느냐? 

떠나가고 돌아오고의 기준이 누굽니까? 기준은 바울이에요. 바울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기준으로 했을 때 떠나가기도 했다가 돌아오기도 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자신을 떠나가는 것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이 점에 대해서는 바울은 사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담대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대충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를 따라오는 분들은 잘 하는 것이고 저를 떠나가는 분들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아예 공개적으로 말씀드리니까 그렇게 아시길 바랍니다. 제가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은 잘 하시는 것이고 떠나가시는 분들은 손해가 막심한 것입니다. 

마가는 왜 중간에 떠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 그랬다느니, 힘들어서 그랬다느니, 판단력이 흐려졌다느니…. 
그런데 적어도 바울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것도 흡족한 변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가 돌아오려고 했을 때 바울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건 대단한 일입니다. 바나바는 받아주자고 했지만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따로 떠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실수를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실수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바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가가 주님의 일에 동참하다가 마음을 돌이켜 떠나간 것은 실수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바울도 한 때 교회를 핍박하지 않았느냐? 바울의 경우에는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본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몰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그런데 충분히 알 만한 사람이 신앙을 떠나가는 것은 그것은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그의 영혼에 위험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몇 가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애초부터 신앙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나지 않고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둘째로 인격적인 문제가 있어서 원래부터 신뢰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첫 번째 가능성, 애초부터 제대로 회심한 것이 아닌데 스스로가 크리스천인줄 알고 주님의 일에 섣불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심각한 영적인 판단력의 미스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사람을 영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두 번 째 가능성, 회심은 했었지만 인격적인 문제 때문에 애초부터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건 더욱 더 심각한 결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저와 함께 하는 것은 반 농담으로 말씀드린 것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믿다가 도중에 옛날로 돌아가는 일은 심각한 일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심의 방법은 여러 가지에요. 점진적인 회심도 있고, 급진적인 회심도 있고, 모태신앙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이 회심할 수 있지만 일단 회심을 하면 그 내용은 같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질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의견이 아니고, 유행도 아니고, 일시적이지 않고 영구적이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르셨고,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은 말하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분별을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즘엔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제가 과거 전도사 시절에 LA 등대교회에서 대학부 예배를 인도할 때 가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할 때 마음에 감흥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이 있다, 이런 감흥이 올 때가 있었는데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 중에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시는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하면 아니나 다를까, 몇 사람이 반드시 일어났습니다. 아주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감흥이 오지 않을 때는 아무리 말을 해도 아무도 안 일어나는데 일어날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감흥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의지로 말미암는 게 아니고,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성령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가 성령으로 거듭나는지, 누가 성령세례를 받을 준비가 돼 있는지, 누가 은혜를 받아들이는지 못 받아들이는지, 누가 마음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성령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분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사람이 거듭나는 것, 회심하는 것은 그저 그의 의견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이 아니고, 더 깊은 본질적인 영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인 회심의 결과는 결과로써 분명히 나타납니다. 회심했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분명한 소속감과 충성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납니다. 만일 이러한 소속감과 소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소속감. ‘나는 예수님 편이다. 나는 예수님에게 속했다.’라는 분명한 소속감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봉사든, 헌금이든, 헌신이든,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소속감과 충성심이 우러나오기 때문이에요. 우러나오는 것이 없는 사람은 우러나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러나기 전에는 우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 과거의 불신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심각한 일이에요. 성경은 그것을 ‘배교’라고 부릅니다, 배교. 실제로 배교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이 영원히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칼빈주의자는 한번 진짜 회심한 사람은 배교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고, 아르미니안주의에서는 한번 회심한 사람도 배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겠습니다마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배교하면 안 됩니다. 우리 거할 처소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갈 데가 없습니다. 탕자가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마가가 한번 떠나갔지만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떠나서 어디를 가겠습니까?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이렇게 하면 되돌아 올 수는 있지만 그 피해가 참으로 큽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마가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마가의 신뢰성에 흠집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바울의 서신에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며, 유행이 아니며, 사람을 보고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인데 우리 마음속에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분명한 그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믿는다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침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가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는데 한가지로 일하러 가야 됩니다. 한 마음을 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 보는 것 같지만 사람들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