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吉善宙, 1869년 3월 25일 ~ 1935년 11월 26일)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영계(靈溪).

평안남도 안주 출생이다. 젊은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무(巫)와 선도에 심취하며 입산 수도하다가,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 1897년 개신교에 입문했다. 같은 해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길선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개를 대중 앞에 하게 된다. 당시 길선주는 목사 안수를 받기 바로 직전이었다.

“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 — 길선주, 1907년 1월 6일 장대현 교회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회개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오면서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

길선주는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 참가하지 않은 네 명의 민족대표 중 한 명이다.

당시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고 모임 불참 사실도 확인된 길선주는 체포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고도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제외되었으나, 최린과 박희도, 정춘수가 추후에 구체적인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변절자로 불린데 반하여 길선주는 공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최근 길선주가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추가로 확인됨에 따라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순직했다.

(출처: 위키백과)